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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7> 5. 두 서울 사이, 길목 (5) 방랑이 낳은 걸작 금오신화와 용궁부연록의 세계

입력 : 2020-07-22 02:58:30
수정 : 2020-07-22 03:12:43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7>

 

5. 두 서울 사이, 길목

(5) 방랑이 낳은 걸작 금오신화와 용궁부연록의 세계

 

낙하나루를 건너며 시작한 방랑생활 10년 만에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 정착한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방랑시절 자료를 모아 금오신화를 저술한다. 금오신화에는 다섯 편의 소설이 전한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등이다. 각각 남원과 개성, 평양, 경주를 배경으로 한다. 모두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이다.

 

 

임진강연안을 배경으로 한 용궁부연록

이중 이생규장전과 용궁부연록이 개성과 임진강 연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취유부벽정기는 배경은 평양이지만 주인공은 개성사람이다. 처음 방랑길에 나섰던 관서여행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생규장전은 개성의 탁타교와 선죽동, 성균관, 오관산을 배경으로 이생과 최랑의 곡절 많은 사랑을 풀어간다. 흥미롭고 여운이 깊은 걸작이다. 용궁부연록은 소설적 재미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김시습 자신을 빗댄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용궁을 구경한 주인공이 명예와 잇속을 끊고 명산으로 들어간다는 전개가 그의 인생과 겹쳐진다. 그리고 개성지역의 실제 지리적 특징을 잘 드러냄으로써 신화적 내용을 현실로 읽도록 유도한다.

 

용궁여행기 용궁부연록

송도에 깎아지른 봉우리들이 하늘 높이 솟은 천마산이 있다. 산 중턱에는 박연이라는 큰 못이 있었다. 글 잘 하기로 유명했던 한생은 어느 날 박연의 용왕에게 초대받는다. 용궁에서는 새로 집을 짓고 한창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한생은 용왕의 요청에 따라 상량문을 지어 올린다. 그리고 여러 신선들을 만나고, 용궁 곳곳을 돌아본 뒤 야광주와 비단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온다. ‘용궁부연록의 대강이다. 일종의 용궁 여행기다.

용왕은 한생과 함께 조강신, 낙하신, 벽란신 등 세 신선을 초대한다. 조강은 김포 앞에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한강이고, 낙하는 한강과 만나기 직전의 임진강이다. 벽란은 예성강 하구다. 이들 강은 천마산과 박연을 세 면에서 둘러싸고 있다.

 

임진강과 한강과 예성강을 한 눈에 보아

조선중기 김육의 여행기 천성일록에 이런 부분이 있다.

“(천마산)동쪽에 대가 있는데 태안사를 굽어보니 마치 땅 아래 있는 것 같았으며 한강, 임진, 벽란 세 강이 손금처럼 보였다.”

용궁부연록에서 한생은 같은 곳을 이렇게 포착한다.

천마산 높고 높아 하늘에 치솟고/ 폭포는 드리워 허공에 떨어지네/ 떨어져 그윽한 구렁을 가지고/ 굽이쳐 흐르며 강물을 이루었네/ 물결 위엔 잔잔히 달빛 거닐고/ 못 속에는 신비로운 용궁이 펼쳐졌네

김육이 바라보이는 대로 경관을 기술한 그곳에서 김시습은 신화를 만들어 냈다. 이런 지리감각은 오늘 남쪽을 사는 사람들에겐 불가능한 것이다. 그 누구도 임진강과 한강과 예성강을 한 눈에 보지 못한다. 지리적 감각을 잃은 사람에게 용궁부연록은 토끼와 자라 속 용궁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 과연 천마산에 올랐던 사람들도 그럴까?

 

 

못을 통해 용궁에 드나들어

소설은 바다가 아니라 박연이란 못 속에 용궁을 그려 놓았다. 이도 당시 개성사람들에겐 낯익은 이야기다. 태조 왕건의 시조 전설에 따르면 할머니인 용녀는 용왕의 딸이다. 그는 왕건의 조부 작제건과 결혼한 뒤 개성에 와 살았다. 용녀는 은접시로 판 큰우물’(대정)을 통해 서해바다 용궁을 드나들었다. 나아가 박연에 얽힌 전설에 이미 용궁이 담겨있다. 이 못에는 박씨 성을 가진 진사가 용녀를 만나 못 속 용궁으로 사라진 뒤부터 박연이라 부르게 됐다는 유래담이 전한다. 못을 통해 용궁을 드나든다는 생각은 개성사람들에겐 지극히 익숙한 이야기였다.

임진강을 건너간 김시습은 그곳에서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이 익숙한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낯선 형식으로 담아냈다. 이렇게 중앙무대를 벗어난 방랑의 길목에서 희대의 걸작 금오신화가 탄생한다. 분단을 살아가는 오늘 남쪽의 누구도 한강, 임진강, 예성강을 손금 보듯 보지 못한다. 그와 함께 금오신화 용궁부연록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것이 됐다. 옛날 고려 적의 신화로 여겨질 뿐이다. 우리가 잃은 것은 다만 신화뿐일까?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 저자

 
#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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